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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의 흑백논리

작성자: 안예모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12-31 15:10:15    조회: 2,384회    댓글: 0

이 글은 계간 "부모가 최고의 의사" 11호에 실린 글입니다.  

 


발행인 칼럼


백신의 흑백논리

 

»»류재천 (발행인)

 

 

  세상에는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특히 익명공간인 경우가 많은 온라인에는 일명 ‘키보드 워리어’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자기 삶의 울분과 불안을 키보드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인 논쟁에서 이들은 극우이거나 극좌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여성 폄하나 인종 폄하, 특정 계층에 대한 피어린 비난과 함께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가정사나 개인사에 대해서도 ‘죽도록’ 달려든다. 스포츠에서는 본인이 싫어하는 선수가 다치면 “잘 다쳤다”는 비아냥은 기본이고, 가족문제까지 거론하여 어떻게든 나쁜 사람을 만들려고 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쓰는 단어는 ‘우리’라는 단어이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처음 들었을 때 제일 당황하는 단어가 “우리 아내”, “우리 신랑” 등의 말이라고 한다. ‘우리’라면 다른 사람과 신랑 신부를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단 ‘남의 편’이 되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일단 비판하고 본다. 자기편이라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을 남의 편이 하면 죄이다. 우리 정치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라는 말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마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희화하여 “남불자로”라는 말도 쓰인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뜻이다.

 

  합리성이 작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다름과 틀림이 같은 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처럼 그것이 잘된 일이든 잘못된 일이든 자기와 다르면 틀린 것이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적 문맹현상은 사람들의 눈이 책에서 모니터로 이동하고, 다시 작은 핸드폰으로 이동하면서 편향성이 심해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뉴스만 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커뮤니티에서만 활동하며, 자기가 보고 싶은 장면만 다운 받아서 본다. 스크롤이 ‘압박’해오면 아무리 그 글이 좋아도 읽지 않는다. 이제는 트위터와 같이 지저귀는

수준의 한 줄짜리 커뮤니케이션이 대세이다.

 

  예방접종 문제는 트위터나 서너 줄짜리 커뮤니케이션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예방접종 문제는 흑백 텔레비전처럼 단순한 두 가지 색깔로 표현할 수 없다. 질병과 환경, 개인의 병력에 따라 어떤 예방접종은 필요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니까 이야기가 길어진다.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공부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옛날 같으면 공부할 만한 내용도 없었지만, 요즘은 인터넷이든, 책이든 충분히 공부할 자료들이 널려 있다. 물론 책을 넘기는 수고와 엄청난

스크롤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남들 하듯 따라하는 일뿐이다.

 

  자세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비난은 생각보다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건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한테 병을 옮길 수 있다거나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예방접종을 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릴까봐 걱정하는 것 자체가 소가 웃을 일이지만, 이들에게 이런 합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임승차란 말도 기본적으로 논리가 없는 비난을 위한 흑백논리일 뿐이다. 무임승차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유임승차”, 즉 돈을 내고 차를 탔다는 뜻인데, 예방접종을 한 사람들이 무슨 ‘돈’을 냈나? 대부분 예방접종은 세금에서 돈을 내주고 있다. 대부분 예방접종을 한 사람들은 무임으로 차를 타고 있다. 왜냐하면 예방접종을 안 하는 사람들도 그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세금은 내고 당연히 받아야

할 혜택을 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비접종자들이다. 돈만 내고 버스는 안 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서 무임이라는 말이 돈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돈 이야기를 한 것은 혜택은 혜택대로 받으면서 그 혜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소통장애’를 말하고자 함이다.

 

  은유적으로 무임이라는 말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더욱더 무임승차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무료로 백신 맞으면서 혜택은 혜택대로 보고, 백신의 효과는 효과대로 보면서 부작용 피해자들을 못 본 체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무임승차이다. 책임은 백신의 안전성을 위해 무슨 활동을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백신에서 수은이 없어지는 데 그들이 무슨 활동을 했으며, 백신 부작용으로 쓰러져간 아이들을 위해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넸는가? DTP가 DTaP로 바뀐 것도 부작용으로 쓰러져간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수은이 빠진 것도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해 활동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정 글로벌 제약회사가 아닌 우리 공동체를 위한 책임 있는 활동이다.

 

  백신을 접종하여 돈을 버는 의사들이나 제약회사, 최소한의 부작용조차 인정하지 않는 질병관리본부 담당자들이 “무임승차”라는 말을 쓰는 것은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이들은 승객이 아니라 운전사이자 운수업자이기 때문이다.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기 버스노선을 안 타겠다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딱지를 붙이는가? 사람들이 걸어가고 싶어서 안 타는 것이 아니다.

 

  돈까지 다 냈는데, 버스 놔두고 걸어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 까? 그 버스가 상습적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제대로 된 보험도 들어있지 않을뿐더러, 사고가 나도 보상을 제대로 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 타는 것이다. 이 운수업자들은 전염병과 의 전쟁에서 백신을 최고 무기로 꼽는다. 그럼 백신 부작용 희생자들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용사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시스템이 지켜지는 것이다. 희생과 평생의 장애를 짊어진 피해자들을 나라로부터 돈이나 뜯어내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그들이 과연 ‘공동체와 책임’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아홉 빛깔 백신 무지개


  많은 사람이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그 병에 안 걸리고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무임승차라는 말이 쓰인다. 이렇게 흑백논리로 단순화하면 싸우기에는 좋지만, 본질을 가린다. 어떤 백신에는 이 말이 어울린다. 홍역 백신의 경우에는 홍역을 줄인 것이 인정되고 있지만, 그것이 MMR 백신을 찬성하는 논리로 승화될 수는 없다. 볼거리 백신은 벌써 실패했다는 것이 모든 수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백신은 오히려 재앙이 되고 있다. 수두 백신이 접종되기 시작하자, 40대 이후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대상포진이 유행하고 있다. 

  수두 백신은 실제로 수두를 별로 줄이지도 못했고, 대신 굉장히 고통스런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성인 사회에 뿌려버렸다. 어릴 때 간단하게 앓을 수 있는 병을 예방하려 한 행위가 노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의 씨앗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정 백신을 접종하는 시기도 문제다. B형간염 백신은 아무 필요도 없는 신생아들에게 접종되고 있다. 태어날 때 접종되는 백신으로 부작용이 발생하면, 아이가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부작용을 겪는 것인지 알아낼 방법 자체가 없다. B형간염 백신은 청소년기에 부작용이 많은 백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 시기에는 자기 표현을 확실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보면 백일해는 확실히 백신을 맞은 아기보다 안 맞은 아기가 더 많이 걸린다. 영아기 백일해에 심하게 걸리면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집중치료를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백일해 백신을 서너 달만 늦게 맞아도 유아기 천식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연구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백일해가 백신으로 예방할 수 없는 변종 백일해라는 연구까지 접하면 우리는 도대체 어느 위치에 있어야할지 심각한 ‘결정장애’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이렇듯 백신의 세계는 빨주노초파남보도 모자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과 적외선까지 등장하는 복잡한 세계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앙이기 때문에 많은 공부와 고려가 있어야 한다.

 

  국가 백신정책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은 인권이다. 자기 몸에 대한 의료 처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대명제는 전 세계적인 공통 원칙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우리 시민들이 돈을 노리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지키지 못할 뿐이다.

 

  개인적인 결정을 할 때는 과학뿐 아니라 행복의 관점이 필요하다.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분명 백신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과대포장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자문해야 한다. 우리 모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부침이 있었다. 부작용을 겪은 사람들이 주로 모였던 초기에는 우리 모임 이름과 달리 ‘안티’가 대세였지만, 지금은 합리성을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요즘 우리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부작용을 겪고 난 후에야 백신의 위험성을 알아차렸던 ‘옛 사람들’에 비해 현명한 것 같다. 백신 부작용은 치료하는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겪고 나서 아는 방식은 너무나 당혹스러운 인생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부작용 때문에 접종 여부를 선택하는 것은 우려되는 지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가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성을 몰라서 그런 이유도 있고, 편리함을 제일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교적 안전한 이유’가 크다. 백신은 누군가에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 도 있다. 흑백논리가 쉽기는 하지만, 흰색과 검정색으로 표현하기에 는 이 세상이 너무 컬러풀하다. 걸어가다 보면 버스 타고 가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버스 탄 사람들이 놀리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단순히 백신 부작용이 무서워서 접종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신접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 두려움이 반대쪽에서 작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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